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인 오스틴 (문단 편집) == 개인적인 이야기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802_304_3.jpg|width=100%]]}}}|| ||<:> {{{#B8860B ''' 오스틴의 오빠가 사준 스티븐턴의 저택. 이곳에서 그녀의 명작들이 탄생했다. ''' }}} || 현재 제인의 흔적은 <설득>의 배경이 된 [[바스]](Bath)와 1809년 오빠가 마련해 준 초튼(Chawton)의 살림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두 곳 모두 오스틴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이 중에서 로마 시대 때 온천장으로 잘 알려진 바스는, 20대 중반의 오스틴이 가족과 함께 이주한 도시이다. 사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바스로 이사한다는 말을 듣고 기절할 정도로 바스를 싫어했다고 한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8남매가 오순도순 살았던 고향을 훨씬 좋아했기 때문이다. 5세기 이후 귀족들이 온천욕을 즐기러 오면서 세련된 살롱 문화가 자연스럽게 전해진 바스는 소박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시골 소녀 오스틴에게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신세계였다. 사치스러운 귀족들의 모습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오스틴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이런 생각들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도도한 태도로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이 동경의 대상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오스틴은 귀족문화가 발달한 바스에서의 경험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다. 바스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초턴은 오스틴의 문학적 세계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아담한 시골 마을이다. 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스민 초턴의 집은 셋째 오빠 에드워드가 마련해준 것으로, 오스틴이 8년간의 바스 생활을 접고 병든 어머니와 친언니 커샌드라와 함께 머물렀던 곳이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얕은 바람이 일 년 내내 살랑거리는 초턴은, 화려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의 바스와는 정반대되는 마을로 오스틴이 글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을 것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풍금 한 대와 악보가 눈에 들어온다. 오스틴이 사용한 풍금은 아니지만,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오스틴은 글뿐만 아니라 풍금을 치며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 한다. 제인의 가족은 아마추어 가족극단을 만들어 목사관에서 종종 노래하며 춤을 추었는데, 이런 가풍 덕분에 오스틴은 연주와 창작에 모두 뛰어난 소질을 갖추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좁은 통로 벽면에 1894년 출간된 <오만과 편견>의 삽화들이 액자 형태로 장식되었다. 중세 시대의 옷을 입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그리고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스케치가 오스틴의 감성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2층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제인의 작품 세계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집필실이다. 중세 시대의 여성 옷가지와 책상, 그리고 친언니 커샌드라가 그린 제인의 초상화 몇 점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802_304_4.jpg|width=100%]]}}}|| 제인 오스틴이 사용한 [[보석함]]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침실.jpg|width=100%]]}}}|| 제인 오스틴의 침실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테이블.jpg|width=100%]]}}}|| 오전에 그녀는 주로 이 책상에서 소설을 썼다. 잉크병과 펜대도 보관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802_304_6.jpg|width=100%]]}}}|| 제인 오스틴이 [[런던]]이나 [[바스]][* 오스틴이 1801년부터 1806년까지 거주했던 곳.]로 외출할 때 사용했던 마차.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제인 오스틴 피아노.jpg|width=100%]]}}}|| 문학뿐 아니라 [[음악]]에 소질이 있던 오스틴이 즐겨 치던 [[피아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802_304_8.jpg|width=100%]]}}}|| 오스틴의 방 내부에는 그녀의 초상화와 의자, 재봉틀 등이 전시되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802_304_9.jpg|width=100%]]}}}|| 오스틴의 책이 출판될 때마다 도서 평이 났던 당시 신문들이다. 가계족보 추적 전문 웹사이트인 '앤세스트리 닷컴(Ancestry.com)'은 제인 오스틴과 [[케이트 미들턴]]이 약 30 촌지간의 먼 친척이라고 말했다. 영국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두 사람의 공통 조상이다. 연애·결혼 소설의 대가지만, 자신은 [[미혼]]으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비커밍 제인>에서는 제인 오스틴이 스무살 무렵에 톰 르프로이를 만나 비밀리에 약혼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 청혼을 받고 수락한 것은 26살 때였다. 상당한 재력가이자 6살 연하였던 남자의 청혼을 받고 수락했지만, 바로 다음 날 취소해 버렸다. 당시 기준으로는 청혼을 받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나이였다고. [[미혼]]이 아닌 '[[비혼]]'을 적극적으로 택한 것 같다.[* 만약 이때 결혼했다면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탄생 못했을 수도 있다. 아이를 낳고 부인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제인이 두 번이나 가짜 결혼을 발표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자신의 아버지가 교구장으로 있던 스티븐턴 교구의 결혼등록부에 자필로 결혼 발표 2건을 적어둔 것이 발견됐다. 10대 때 친 장난인 듯하다. 재미있는 점은 결혼 상대의 이름은 피츠윌리엄과 에드먼드라는 것. 나중에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인 오스틴의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스티븐톤 교구의 교구장이었으므로 교구 결혼등록부의 관리 책임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당연히 아버지가 관리하는 문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가상의 결혼 발표문도 장난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햄프셔 카운티의 평의회의 문화, 오락 집행위원인 앤드류 깁슨은 "아마도 제인 오스틴은 이 가짜 결혼 발표문을 작성할 때 십대였을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를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유머로 가득한 제인의 소설들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성격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제인 오스틴은 어린 조카딸 프레니 나이트가 결혼을 염두에 둔 남자에 대해 조언을 구했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가 그를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 언질도 주지 말고, 그를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도 안 했으면 싶다. 애정 없이 결혼하느니 다른 것들이 더 낫거나 더 견딜 만하단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80px-CassandraAusten-JaneAusten(c.1810)_hires.jpg|width=100%]]}}}|| 오스틴의 언니 커샌드라가 수채화로 그린 [[초상화]]다. 오늘날 제인 오스틴의 얼굴을 그린 인물화들은 이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843.jpg|width=100%]]}}}|| 제인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오스틴의 형제 중 한 명의 직계 후손인 라이스 가문의 소유물이다. 라이스 부부는 이 그림이 제인의 모습인데, 오자스 험프리로부터 1788년 12살 제인과 언니 커샌드라가 켄트에 있는 큰삼촌 프란시스를 방문하기 위해 갔을 때 의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그림의 정체는 수십 년 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이 사진이 제인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해외 판매 허가를 내준 국립 초상화 갤러리를 포함한 전문가들은 이 드레스의 스타일은 한참 후인 1800년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한 의심은 2007년 크리스티가 그린 라이스 초상화를 경매에 부쳤을 때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2011년 학자 폴라 번이 오스틴의 잃어버린 초상화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오스틴의 초상화는 둘 다 그녀의 여동생 커샌드라에 의해 스케치된 두 장뿐이다. 라이스 가족은 자신들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어준다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다. 르프로이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명되지 않은 노트는 가족 연계를 통해 리스에게 전달됐다. 이 그림의 주인 앤 라이스의 아들 존 네틀폴드는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 역사'라고 표기된 작은 갈색 봉투가 현재 주인이 발견하기 전까지 오스틴의 글쓰기 책상에 보관되어 있어 간과되어 왔다"고 말했다. 레프로이는 오스틴이 죽은 지 3년 후에 태어났지만 소설가의 동생 제임스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오스틴을 잘 알았다.[[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9/jan/23/jane-austen-family-say-note-establishes-disputed-portraits-identity|#]] 2013년 제잇 오스틴의 초상화가 경매에서 16만 4500파운드(2억 8400만 원)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오스틴 초상화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데다가, 2017년부터 영국 10파운드 지폐에 새겨진 그림이다. 수채화인 이 그림은 1869년 제인의 조카가 의뢰하여 그린 것으로, 제임스 앤드류스라는 화가가 그렸다. 이 작품은 이후 매각되면서 오스틴 가문의 손을 떠났으나 일반에 공개된 적은 거의 없다. [[소더비]] 경매장 관계자는 "공개 시장에 나올 것으로 보이는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이 초상화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이 작품이 개인 수집가에게 팔렸다고 전했으나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ane-austen-memorial.webp|width=100%]]}}}|| ||<:> {{{#B8860B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새겨진 제인 오스틴의 이름. ''' }}} || 묘지는 그녀의 고향인 햄프셔 주 윈체스터 대성당에 있다. 1967년에는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웨스트민스터 사원]] 남쪽 익랑에 그녀의 이름이 등재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편지가 사후에 언니와 친구에 의해 거의 다 없어졌다. 남은 편지를 원문과 함께 볼 수 있는 번역 편집본이 있는데 2019년 9월에 마음산책판의 제인 오스틴의 말들이라는 책이다. [[홍차]]를 굉장히 좋아했다. 오스틴 전문가들이 제인 오스틴의 작품과 그녀가 남긴 편지들을 통해 유추한 결과 제인 오스틴이 즐겼던 아침은 홍차와 토스트였다. 전통적인 아침식사는 맥주와 에일(맥주의 일종으로 알코올 도수 6~8도 내외), 고기가 포함된 푸짐한 음식이었다. 따라서 제인이 즐긴 아침식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홍차에 대한 사랑은 '그와 차를 마시다'라는 책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이 책에는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일상에서 차가 어느정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집안에서 홍차를 직접 구매하고 관리하는 티 소믈리에였다. 당시 차는 매우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차를 보관하는 서랍의 열쇠를 제인 자신이 보관할 정도로 비쌌다. 가끔 하인들이 차를 몰래 내다팔기도 했으므로 차에 대한 감시가 엄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차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제인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없다. >'제인 오스틴은 구입한 차를 아무나 꺼낼 수 없도록 차 보관함에 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식사 때나 손님이 방문했을 때 그녀는 직접 차를 준비했다. 조카 캐럴라인 오스틴은 <나의 고모 제인 오스틴>에서 "아홉시면 고모는 아침식사를 만들었다. 이것은 고모가 맡은 집안 일이다. 차와 설탕은 고모의 감독 아래 있었다"고 기억했다.'(<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중) 그가 자주 갔던 찻집은 트와이닝스며 좋아하는 도자기 브랜드는 웨지우드였다. 트와이닝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 홍차 브랜드다. 여름휴가지로도 유명한 라임 레지스는 실제 제인 오스틴이 가족과 함께 1803년과 1804년에 두 차례 방문했던 곳이다. 제인 오스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설득>에 진기하고 매력적인 해안 마을, 라임 레지스가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책]]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제인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산책을 매우 좋아한다. 오스틴의 마지막 작문은 그녀가 죽기 3일 전에 언니 커샌드라에게 받아쓰도록 한 시였다. 그 시는 영국의 비오는 날씨에 대한 유머러스한 짤막한 시였다. 추정 키는 5'2''(feet & inches), 157.4 cm이다.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큰 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